이런 초심은 더욱 깊은 기원이 있었다. 바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음란함과 성문란이다.
마르크스는 1843년 남작가문의 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했지만, 아내의 집안에서 보낸 임신 중인 아내를 도우라고 보낸 22세 처녀 가정부 헬레네 데무트를 성적으로 착취했다. 마르크스는 평생 착취를 극도로 증오하는 척했지만 그 자신은 ‘자본가’ 엥겔스가 착취해온 돈을 거리낌 없이 쓰고 가정부를 성착취해 1850년 사생아를 낳았다.
이로 인해 아내와 불화가 생긴 마르크스는 독신이었던 엥겔스에게 ‘공산주의자 동맹’의 명예를 위해 희생할 것으로 요구했다. 엥겔스는 사생아에게 자신의 성(프리드리히)를 붙여 한 노동자 집안에 양육을 맡겼고, 죽기 직전 후두암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되자 ‘헨리 프리드리히는 아들’이라는 메모를 남겨 억한 심정을 드러냈다.
엥겔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가정도 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맨체스터에서 사실혼 관계였던, 메리의 동생 리디아 번즈, 그리도 두 사람의 조카들과 한 방에서 생활하며 초기 공산주의 집단생활을 했다. 엥겔스는 메리가 숨지자 리디아와 연인인 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셋은 모두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레닌은 구소련이 붕괴된 후 공개된 기밀문서를 통해 사망원인이 매독으로 밝혀졌다.
레닌은 청소년 시절부터 음란한 생활 때문에 매독에 걸렸고 25세부터 매독 치료를 받았지만 평생 치유되지 못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옥화칼륨이라는 당시 매독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약물을 대량으로 투약했다. 레닌은 신경성 매독으로 인해 뇌 기능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
레닌 사후 부검에 참여한 의사 27명 중 8명은 체내 탄두와 뇌동맥경화라는 사망진단서에 서명해 레닌의 명예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주치의 2명 등 나머지 19명이 거부했다. 구소련 고위 의사들은 이를 알았지만 국가의 힘 앞에 발설하지 못했다.
스탈린은 23세에 알릴루예바에게 반해 관계를 맺었다. 스탈린이 이후 전우 아랴오샤의 여동생 카잘을 아내로 맞이했고, 카잘이 죽고 나자 안나라는 여자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그러나 6년만에 스탈린은 25세 연하의 스베틀라나를 아내로 맞이했다. 자신의 부인이었던 알릴루예바의 딸이었다. 스탈린은 스베틀라나가 자신의 친딸인 것을 알고 있었다. 훗날 스베틀라나는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