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거란의 요는 흥종(興宗)과 도종(道宗) 시대에 이르러 국력이 약화돼 서하의 도전을 극복하지 못했다. 서하의 조상은 선비족의 갈래인 당항인(黨項人) 척발적사(拓跋赤辭)로 황하 상류에 살다가 정관(貞觀) 초기에 당에 귀화해 이씨성을 하사받고 조공국이 됐다. 그의 후예가 섬서성(陝西省) 횡산현(橫山縣)의 서쪽 하주(夏州)에 거주하면서 평하부(平夏部)라는 호칭을 얻었다. 당말 황소(黃巢)의 난에서 척발사공(拓跋思恭)이 공을 세워 정난(定難)절도사로 임명됐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섬서성 북부 연수(延水)의 이북에서 수원(綏遠)의 남부까지로 5개 주를 포함했다. 철발사공은 하국공(夏國公)이 됐다. 그의 후손은 이씨가 돼 오대시대에서 북송 초기까지 중국과 기미관계를 유지했다. 송태종의 태평흥국5년(980), 이계봉(李繼捧)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종족과의 불화로 2년 후 송에 입조하고 3개의 주를 헌상했다. 반발한 이계천(李繼遷)이 동북쪽으로 이주해 은주와 하주를 침공하자, 북송은 군사적으로 제압하려지 못했다. 6년 후 이계천은 요와 연합해 북송을 계속 괴롭혔다. 송은 이계봉을 절도사로 임명해 조보충(趙保忠)이라는 이름을 주고 이계천을 견제했다. 송은 이계천 거짓으로 항복하자 절도사로 삼고 조보길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계천은 반란과 항복을 반복하면서 세력을 강화하다가 토번(吐蕃)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아들 이덕명(李德明)은 경덕3년(1006)에 송에게 서평왕(西平王), 요에게 대하국왕으로 봉해졌다. 이덕명의 시대 30년 동안은 북송과 큰 마찰이 없었다. 말년에 이덕명은 아들 이원호(李元昊)를 시켜 위구르족을 격파하고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1032년에 계위한 이원호는 제위에 올라 동으로 황하 서쪽, 서로 옥문관, 남으로 감숙, 북으로 고비사막까지 차지했다. 그가 서하의 창업군주 경종(景宗)이다. 중국인은 이 왕조를 자기의 역사에 편입했다. 이원호는 중국식 정치제도로 개편하고 한족을 중용했지만, 서하문자를 창제해 한문과 불교를 번역했다. 송은 그의 성과 관작을 박탈하고, 하송(夏竦)과 범옹(范雍)을 파견해 공격했다. 이원호는 섬서에서 송군을 대파했다. 송이 다시 파견한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은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했다. 지구전을 견디지 못한 이원호는 결국 송과 화의를 체결했다. 송은 이원호를 하국왕으로 봉하고 해마다 은 2만 5000량, 비단 15만 3000필, 차 30000근을 주기로 합의했다. 서하는 형식적으로 송의 속국이었지만, 사실상 독립국이었다. 송의 재정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서하는 요에게 저자세를 유지하며 지원을 유도했다. 요는 서하가 송의 서북방을 위협하는 동안 동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요와 서하는 이덕명의 시대에 결혼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제위에 오른 이원호는 요와 갈등을 일으켰다. 1044년, 요의 흥종은 이원호를 공격하다가 패했다. 1048년, 이원호가 아들 영령가(寧令哥)에게 살해되자, 송은 이원호의 어린 아들 이량조(李諒祚)를 하국왕으로 봉했다. 그가 의종(毅宗)이다. 1049년, 요의 흥종이 다시 서하를 정벌했지만 결정적 승리는 얻지 못했다. 이듬해 양국은 화의를 체결했다.

송, 요, 서하는 서로 견제하며 소모전을 펼쳤다. 그동안 세 나라 모두 황제가 바뀌었다. 1067년에는 서하의 이량조가 죽고, 아들 혜종(惠宗) 이병상(李秉常)이 즉위했다. 송과 서하의 소규모 교전이 계속됐다. 1081년, 송은 5갈래로 나누어 서하를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듬해 송의 서희(徐禧)가 일시적으로 서하를 궁지로 몰았지만, 얼마 후 서하의 공격을 받아 20만명을 잃었다. 이후 송은 서하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지 못했다. 이병상의 사후에도 서하는 요의 지원을 받아 끈질기게 송을 압박했으나 1115년까지 대규모 전쟁은 없었다. 송과 서하의 오랜 전쟁은 북송이 멸망하고 남쪽으로 옮기면서 끝이 났다. 서하는 1125년 요가 망하고 2년 후에 몽고에게 멸망했다. 고려는 세 나라의 충돌을 적절히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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