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아무 것도 아닌 듯’ 그러나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 Ⅱ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아무 것도 아닌 듯’ 그러나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 Ⅱ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3.03.29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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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지난호에 이어서)

성능경의 퍼포먼스는 한 손에 타원형의 부채를 들고 권투선수가 입는 것 같은 붉은색의 가운을 입은 채 은색 여행용 가방을 들고 입장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때 짙은 검정색 동그란 안경을 쓴 성능경은 입장하면서 천연덕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는데, 여기에는 그 특유의 교묘한 시선의 정치학과 처음부터 관객을 압도하려는 카리스마6)가 깔려있다. 그는 퍼포먼스가 벌어지는 현장의 한 가운데에 서서 부채에 적힌 제문(祭文)/시축문(성능경)을 낭독한다. ‘유세차(維歲次)’를 낭송하는 형식으로 시작하는 제문은 당일 행사의 내용을 압축한 것으로 축원문 형식으로 돼 있으며, 내용은 그때마다 다르다. 제문을 다 읽은 성능경은 부채의 맨 위에 라이터로 불을 붙인 뒤, 손으로 살살 부치면서7) 관객석을 천천히 돌아다닌다. 성능경이 들고 입장한 여행용 가방 속에는 퍼포먼스에 쓸 다양한 소품들이 들어있는데, 그것은 족히 ‘종합선물세트’라고 부를만한 것들이다. 퍼포먼스를 하러 걸어 들어 올 때 성능경이 쓴 갈색 모자는 비행사의 그것을 연상시키는데, 그것 또한 매우 인상적이어서 마치 성능경의 트레이트 마크처럼 돼 버렸다. 그가 늘상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하는 새총을 비롯하여 탁구공, 훌라후프, 트위스트 목베개 등등으로 이루어진 ‘종합선물셋트’는 퍼포먼스에 필요한 소품들의 비유적 총칭이다.

성능경 특유의 언어 퍼포먼스(verbal performance)는 신문이나 잡지, 광고 전단지 등에서 채집한 문장이나 문구 등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편집 혹은 뒤튼 것들이 대부분이다. 성능경은 이 문장이나 문구들을 탁구공에 적는 행위로부터 퍼포먼스를 시작한다. 그것들은 일상을 통해 이루어지며, 정작 퍼포먼스에서 발현되는 것은 탁구공에 적힌 경구들을 낭독할 때이다. 성능경은 탁구공에 적힌 촌철살인의 경구들을 읽은 뒤 새총에 장전하고 관객들을 향해 날린다. 관객들에게 날리기는 했지만, 정작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다름 아닌 ‘사회’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능경은 평범한 대중 혹은 문자 그대로의 ‘꼴통들’에게 역으로 도발적인 똥물을 끼얹는 것이다. 해학과 풍자의 이름으로 말이다. 금번 전시에 출품된 부채의 잔재와 탁구공들은 다름 아닌 이런 성능경의 언어 퍼포먼스의 잔재들이자 그 자체 하나의 작품이 된다.

여기서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부채나 탁구공에 적힌 내용이나 그 자신의 어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22년 8월 13일 성능경’이라고 서명이 된 한 탁구공에는 “....춥지만, 우리/이제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기/한참을 돌아오는 길에는/채소 파는 아줌마에게/이렇게 물어보기/희망 한 단에 얼마예요//시인 김강태 : 돌아오는 길”8)

또 가운데에 반원형의 큰 구멍이 난 부채의 둥근 테두리에는 검정펜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가운데 빈 공간은 학생들에게 잘라주고, 부채질 하고, 다 오린 다음에 끝나기 직전 다시 부채질해 주고 놀았다. 제목은 미정. 2019.10.15. 화(火) Poland Gdansk”9)

이처럼 기성의 광고 전단지를 비롯하여 영화선전광고, 잡지, 티브이, 신문 등등 주변에 산재한 온갖 사물들로부터 인용한 각종 문구들은 전시나 퍼포먼스를 앞두고 집중적으로 채집에 들어가는 성능경의 창작 습관에 기인한다. 이러한 창작방법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광범위하고 다양해 지는데, 이를테면 이번 전시에 출품된 <그날그날 영어(EVERYDAY ENGLISH)>는 매일 집에 배달되는 동아일보의 장기연재물을 활용해서 일상 속에서 혼자 하는, 즉 관객이 없는 솔로 퍼포먼스(solo performance)와도 같다.

성능경은 독자들에게 매일 영어를 익히게 하려는 기사의 목적에 따라 충실히 공부한 흔적을 남긴다. 사전에서 찾은 단어의 뜻을 비롯하여 갑자기 떠오른 단상, 기사의 내용과 관련된 이미지와 생각들을 연필이나 색연필, 볼펜 등등 다양한 필기구를 사용하여 여백에 적고 부분부분 칼라펜으로 밑줄을 긋거나 박스 표시를 하는 등 흥미 있는 미적 결과를 남기고 있어 주목된다. 이번 전시에 설치된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성능경의 <그날그날 영어(EVERYDAY ENGLISH)>는 작품을 낱개로 볼 때와 군집으로 볼 때 관객이 느끼는 미적 감흥이 서로 다르다. 이 작품이야말로 성능경이 늘 주장하는 ‘소통의 불통’ 철학10)이 확실히 드러난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대중을 겨냥한 영어교육의 맹점과 장단점11)을 예리하게 지적함과 동시에, 자신의 예술 행위를 통해 놀이 욕구의 충족은 물론 자신의 영어 공부, 나아가서는 삶과 예술의 일치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는 예술적 태도이다.

(다음호에 이어서)


6) 그것은 또한 검정색 안경 너머로 상대를 관찰하는 기관원을 상징할 수도 있고, 권력자를 암시할 수도 있다.

7) 불이 붙은 부채를 살살 부쳐 바람을 일으키는 이 행위는 결과적으로 불을 더욱 가속화하게 되는데, 여기에 성능경 특유의 반어법(反語法)이 담겨 있으며, 그러한 반어법은 그가 만든 조어인 ‘소통의 불통’에 이르러 특유의 예술론으로 발전한다.

8) 필자가 성능경의 퍼포먼스 현장에서 주은 탁구공에 적혀있는 내용임.

9) 이 부채의 손잡이에 성능경은 다음과 같이 썼다. 예술아카데미 PATIO에서 ASP. 성능경 Intermedia 워크숍. 필자가 폴란드의 그단스크에서 열린 퍼포먼스 장소에서 주은 부채 손잡이에 적힌 내용임.

10) 이러한 성능경의 철학이 집약된 일행십자총백자예술론(一行十字總百字藝術論)은 다음과 같다.

예술은 비싼 싸구려이다. 2.예술은 소통의 불통이다. 3. 예술은 쉽고 삶은 어렵다. 4.예술은 직관의 폭력이다. 5.예술은 남 말로 내 말한다. 6. 예술은 착란의 그림자이다. 8. 예술은 무관의 제왕이다. 9. 예술은 죽고 작가는 없다. 10. 예술은 꿈꾸는 자유이다.

11) 가령 신문연재물인 <EVERYDAY ENGLISH>의 경우 음성의 부재(단점)와 실용영어의 지식증대(장점) 등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