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나무위키(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최익현)
출처:나무위키(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최익현)

12월 5일 사이드뷰 시선에 포착된 인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최익현입니다.

1833년 음력 12월 5일,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최익현은 4세에 포천을 떠나 충청도 단양군으로 이주하였으며, 14세에 부친의 권유하에 문신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23세 때인 1855년, 정시 문과에서 병과 11위로 급제하였으며, 성균관을 거쳐 사간원, 이조정랑 등의 관직을 임명 받았습니다.

최익현은 생전에 특히 흥선 대원군과 갈등이 깊었던 사이이기도 했는데, 1868년 대원군이 고종의 대리 섭정이었던 시절,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경복궁 재건으로 나라가 도탄에 빠지자 반기를 들며 민생을 파탄하고 국가 재정을 바닥나게 하는 과소 행위라며 상소를 보내 혹독하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는 또 여기에 그치지 않고 1873년에 두 차례나 상소를 올려 흥선 대원군의 과소 행위와 무리한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며 대원군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돌직구를 날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문호 개방 반대 운동을 하였는데,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일본과 문호를 개방하는 협상이 진행되자 위정척사 운동의 선봉장으로 나서서 반 개화와 외세 척결 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고종은 결국, 도를 지나친 최익현을 전라남도 신안 흑산도로 위리안치 시켰습니다.

그러나 최익현은 귀양 이후에도 문호 개방이 확대되자 개화에 반대하는 유생 및 백성들과 함께 위정 척사 운동을 전개하였고 개화파 역신 처단과 외세 철수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이후 얘기로 최익현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 당하였습니다.

또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본 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는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임락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기일본정부’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을 배포한 뒤, 순창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습니다.

최익현은 체포된 이후 대마도에 유배되었는데, 일본인이 밥을 주니 일본 식으로 머리를 깎으라는 요구에 왜놈이 주는 더러운 음식은 먹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단식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설이 있지만, 일각에서는 사실 최익현과 더불어 최익현과 함께 유배를 간 제자들도 모조리 단식하였으나, 결국 일본 측에서 오해가 있었음을 알리고 머리를 안 깎아도 된다고 해서 죽을 먹기 시작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3개월 후 풍토병에 걸려서 약 1개월간 투병하다가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시신은 대마도를 떠나 부산으로 운구되어 충청남도 예산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최익현에 대한 평은 긍정적인 평과 부정적인 평으로 나뉘곤 하는데, 이는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 진정한 선비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라든가 ‘최익현을 비롯한 친중 위정척사파들은 조선이나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념인 주자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이념을 더 중요시했다’ 등의 평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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