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 칼럼] 글쓰기, 마당을 쓸고 정원을 가꾸다(2)

홍영수

 

중, 고등시절이었다. 나만의 자그마한 공부방을 갖고 싶었다. 의자에 앉아 손만 뻗으면 원하는 책을 책꽂이에서 빼내어 읽을 수 있는 공간, 그와 더불어 전축 하나 곁에 있어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책도 보고 글도 써 보고 싶었다. 나만의 공간에서 독서와 음악, 사색과 명상, 한마디로 독락당(獨樂堂) 같은 곳이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신, 특히 노래 가사를 많이 쓰셨던 형님의 영향을 받아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독서와 글쓰기는 깊은 사색에서 우러나온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면서 글쓰기의 마당을 쓸고 닦고, 정원을 손질하고 가꿔놓은 곳에서 사람을 만나도록 해준다. 이렇듯 삶과 언어와 글이 만난 글쓰기는 자기의 경험과 체험에 근거한 자기의 언어 행위이다. 

 

작가는 글쓰기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주는 표현이면서 또한 존재의 확인은 곧 자아를 표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야 하는 두려움과 줄을 타는 어름사니와 같은 희열을 동시에 느끼면서 자아를 노출하는 나르시시즘을 느끼는 일이다. 그냥 무의하고 무덤덤하게 설명하는 글쓰기는 안 된다. 진실의 붓을 손에 움켜쥐고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에서 글을 써야 한다. 

 

송나라 문인 구양수는 글을 잘 쓰려면 多讀, 多作, 多商量의 삼다(三多)를 말했다. 많은 책을 읽고, 쓰고,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저 읽고 쓰기에 멈춘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생각으로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다만 글쓰기의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자세는 버려야 한다. 작가로서의 명성과 명예에 구애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로서 문인이 되어야 하지 어느 문단인으로서의 문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우리 문단의 현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는 비판적 사고와 의문과 질문을 하는 入書法을 활용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出書法을 익히는 독서를 해야 한다. 대나무를 그리려면 대나무 속으로 들어가야 하듯 책 속으로 들어가 책이 되고 책이 된 후 책 속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다중성의 성격이 바로 독서와 글쓰기가 아닌가 한다. 

 

지금은 통섭과 융복합의 시대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전공을 넘어서 인접 학문과 연계한 공부를 해야 한다. 지식의 다양함을 섭렵하기 위함이 아닌, 학제간의 벽을 허물어 그 너머의 것을 궁구하기 위해서다. 한 우물만 파는 시대는 지났다. 양질의 물을 얻기 위해서는 이 우물과 저 우물을 파서 비교 분석해야 한다. 파스칼 키냐르는 68혁명 시기에 철학도였다. 그는 “획일화된 유니폼을 입은 사상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하면서 철학이 도그마로 변하는 것을 보기 힘들어했다 한다.

 

그 무엇에도 구애됨이 없는 노마드의 공부를 한 사람에게 전공자 아니라고 얘기하는 자체가 모순이다. 의외로 주변을 둘러보면 소위 전공자랍시고 지식의 gate keeper 행세를 하는 사람이 많다. 문을 잠그고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며 지식의 문지기 노릇을 한 사람 말이다. 전문가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통섭, 융복합의 시대이다. 요즘 미술관에서는 convergence의 전시회를 여는 경우가 많다.

 

소프라노의 대가인 마리아 칼라스와 테발디, 그 둘은 호각지세를 이루는 소프라노의 대가들이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사랑 한 번 못했던 테발디는 애정의 결핍으로 인해 사랑이 거세된 감정의 사막과 같은 메마르고 삭막함이 서려 있고, 그에 반해 칼라스는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충분한 체험을 했기에 사람들의 영혼을 울릴 수 있었다. 이렇듯 사랑을 경험한 칼라스처럼 글쓰기 또한 관념이 아닌 다양한 경험과 체험적 요소에서만이 진한 감동을 주는 글을 쓸 수 있다.

 

질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얘기했듯이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 즉, 그 어떤 삶의 방식이나 가치추구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의 내가 아닌 그 너머의 새로운 나를 찾아 떠나는 노마드nomad의 삶, 이렇듯 전문가가 되기보다는 전인이 되어야 하는 시대이다. 예를 들어 세기말 문학, 건축, 음악, 미술 등의 분야가 빈이라는 무대에서 서로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씨줄 날줄로 엮였을 때 문화와 지성사가 절정에 이르렀다. 이렇게 볼 때 특히 문학과 예술은 결코, 독립적일 수 없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적당히 써서 결론 내는 것은 싫다. 음악에서 장, 단조의 이질적인 결합으로 서로 충돌하면서 결론을 도출하는 글쓰기, 항상 의문으로 시작해서 종지부가 없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 인간은 호모 로퀜스, 언어적 인간이다. 마당과 정원 속의 고독과 사색과 침묵과 독백의 공간에서 독백과 침묵과 사색과 고독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이곳에서 언어를 통해 갈고, 닦고, 쓸고, 다듬고 싶은 곳, 글의 마당과 정원에서 책장 속의 조용한 웅성거림과 도란거림으로부터 나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40여 년을 청계천(지금은 동묘) 고서점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 자주 들른 서점의 시집 코너가 텅 비었다. 새로 펜션을 지은 사람이 장식용으로 몽땅 사 갔단다. 그래도 시집으로 장식하려는 구매자의 수준 높은 의식?에 박수라도 보내야 하는 걸까? 실력과 능력을 갖추지 않고 그런 척하는 에피고넨의 아류들, 클래식 공연장에서‘안다 박수’ 치듯이 이러한 고상한 척, 속물적인 physical art-snob의 부류는 결코 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지금도 꾸준히…·…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문학작품 공모전 금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 

이메일 jisrak@naver.com

작성 2022.09.26 11:30 수정 2022.09.26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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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